일시 : 1990.10.28(주낮)
본문 : 고전 6:1~8
제목 : 교회안의 송사문제
1. 교회안의 문제발생
본문에는 교인들의 사이에 일어난 법적인 문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당파싸움, 인본주의, 음행 등으로 병들어 버린 고린도 교회에 또 다른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일이 있었다” 했고 “세상사건이 있었다”(4) 했고 “세상 일이 있었다”(3) 했고 “형제간의 일”(5)에 대하여 말했고 “지극히 작은일”이라는 여러 가지 표현이 있는데 여기 말하는 “일” 이라고 하는 것은 교인들 사이의 어떤 문제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교인들 사이에 발생해서 서로 싸우다가 해결을 보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 하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에 장로님과 어떤 집사님이 아니면 다른 교인들끼리 재산 문제로 싸우다가 서로 법에다 소송사건을 일으켰다면 그 얼마나 덕이 상하고 교회가 시끄러웠겠습니다. 더군다나 고린도 교회는 그렇게 큰 교회 같지도 않은데 이런 교회에서 법정싸움이 벌어졌으니 얼마나 말들이 많았겠으며 교회가 소란했겠습니까? 이 소식을 들은 바울 선생님은 교인들 사이의 문제를 은혜로 해결하지 못하고 법적인 소송을 일으키는 것은 큰 당치 못한 일이라고 그들을 꾸짖은 것입니다. 이것은 불의한 일이고 이런 문제는 당자끼리 은혜롭게 아니면 교회 안에서 조정이 이루어져야지 그리스도의 지체끼리 서로 싸우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이렇게 악화된 것 때문에 교회 전체가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 졌기 때문에 온갖 문제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집에 화재경보기가 있어서 벨이 자동으로 울려 화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에 불이 나서 두 여자가 타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사해 보니 화재경보기는 고장이 없었으나 파티하던 날 촛불 연기에 경보기가 울릴까봐 누군가가 스위치를 내려놓은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재앙을 당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기도와 말씀의 스위치를 내려놓으면 어그러진 길로 가더라도 양심이 무디어져서 경보를 크게 울리지 못하고 갈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 사이의 재판이나 고소사건도 갈 데까지 간 사람들 사이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양심이 아니라 감정과 혈기가 앞서고 서로 물고 뜯고 하다가 부끄럽게도 세상 법에다 시비를 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는 오만가지 사람이 다 모이기 때문에 여러 시험들이 일어납니다. 몸은 교회에 담았지만 마음은 세상 사람과 다름이 없는 은혜 받지 못한 이들도 있으며 영성을 모르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 교회들 중에는 미국교회의 예배당을 빌어서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주일에도 미국 사람들이 예배를 본 후에야 예배당을 사용해야 하니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불편을 격고 있던 어떤 한국인 이민교회가 전 교인이 5년동안 정성껏 헌금하여 10만불이 되었습니다. 이 10만불 속에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정성과 사랑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꼬박 꼬박 십일조를 바치고 어떤 이는 흑인지대에 들어가 장사하는데 권총을 차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루하루 벌어서 정성껏 헌금했으며 노인들은 남의 집에 가서 청소하고 아이들 봐주고 받은 돈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건축헌금 10만불이 모였습니다. 교회는 교회 재정을 두 명의 장로님에게 맡겼고 그들의 이름으로 은행에 예금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좋은 건물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마침 그 돈으로 살만한 빌딩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두 기둥이신 장로님들에게 전화를 해서 함께 건물을 보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로님들이 이것 나쁘고 저것 나쁘고, 이것 안좋고, 저것 안좋고... 등 등의 이유를 달아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수상한 감을 잡은 목사님이 은행에 예치금을 체크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6개월 전에 교회 돈 10만불을 찾아간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변호사와 경찰에 연락해서 조사해 보니 두 장로가 그 막대한 돈을 환락가 라스베가스에서 모두 탕진한 것입니다. 주말이면 이런 짓을 되풀이 한 것입니다. 토요일은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주일은 교회에서 지낸 것입니다. 그 후부터 재정 관리를 철저히 하고 일정한 금액부터는 당회장의 인준과 허락 없이는 지출 할 수 없도록 조처했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이런 자들도 끼어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믿고 맡겼더니 하나님의 돈을 축낸 현대판 가룟유다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도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생겨서 급기야는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서로 이기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2. 성도들 사이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느냐? 1절에 사도가 한 말입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는 힐문입니다. 그 다음에 6절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고 언성을 합니다. 또한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요 완연한 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끼리 서로 싸워서 법적인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가 두 파로 나누어져서 서로 건물을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변호사를 대고 오래 끌다 보니 소송비용이 건물 값보다 더 하더랍니다. 이런 일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계에서 탁명환이라는 사람이 이단 종파를 연구하고 퇴치운동을 하는데 그것이 지나쳐서 엉뚱한 목사님들을 다치게 하고 어떤 때는 우리 합동교단의 평동노회인가 목사님 90여명 이상을 몽땅 고발해서 세상 주간지에까지 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는데 그것이 도에 지나치자 한국교회의 여기저기서 도가 지나치니 이 영적 공해를 정화해야 된다는 의론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은 이번 총회에서 이 사람을 강단에 세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토요일 즉 어제 총신대학 에서는 한국교회 강단 보수를 위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그 초대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 강단의 현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는커녕 사람이 영광을 도적질하고 비진리가 판을 치고, 사이비 종교인들이 더 극성을 부리고 불건전한 자가 더욱 더 날뛰며 교회를 잠식하고 있음에 뜻있는 성직자들이 한국교회의 강단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서 같이 염려하며 기도하는 중에 제75회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합)가 “불건전한 강사 탁명환씨를 초청금지 한다.” 는 결의를 함에 이를 힘입어 뜻을 모아 한국교회 보수협의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그 첫 사업의 일환으로 『사이비 종교인과 그리고 종교문제 연구소가 한국교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세미나를 갖게 된 것입니다.」-기독교신문 1990.10.28. 1122호
기독교 각 언론기관의 후원으로 총신대학 신관 대강당에서 강사는 박영희 학장의 다수였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서 점잖은 교단이 세미나 까지 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종교문제 연구소와 탁명환씨가 바로이 서로 고소하고 고소당하는 일로서 또 월간종교라는 잡지와 언론을 통해 서로 헐뜯고 감정적으로 싸우고 선동적인 기사 등으로 교계에 큰 덕을 자주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제3자들도 “너무하다” 이것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서로 비난하고 고소하고 또 사과하고 또 번복하고 성명전을 벌리고 예수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아주 악질적인 자가 교회에 들어와 말도 안되고 선의와 은혜로 안되면 부득불 법에 호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교인들끼리의 문제는 화합과 사랑의 타협을 통해 해결할 것입니다.
3. 이런 문제는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게 원칙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이는 시비가 있는데 즉 법정적인 싸움이 될 만한 일이 있는데 「성도 앞에서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성도가 장차 세상을 심판하고 천사들 즉 마귀들을 심판 할 때가옵니다. 세상과 영적인 큰 존재들까지 심판할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까짓 지극히 작은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즉 교회 재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화합과 타협으로 안되었을 경우는 우선 세상 법정으로 가기 전에 교회에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님이나 당회나 혹은 특별위원회를 만들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교회자체가 시험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이웃교회에 나가는 성도들 사이에 돈 문제로 시비가 되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중재를 하시다가 한편이 불만을 품고 목사님에게 대들려고 하는 것을 마침 제게 상의 해 와서 「천부당 만부당 큰 일 날짓 말라」고 말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도가 말한 대로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는 어느 한편만이 아니라 양편이 다 우선 원해야 하고 또한 5절의 말씀같이 「너희 중에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지혜 있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즉 양편이 다 승복할 만한 지혜롭고 훌륭한 신령한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 쌍방간의 문제를 잘 심사하고 기도하면서 재판을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만 있다면 이런 일은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하여 교회의 권의를 인정안하는 자는 잡아넣는 것이 옳습니다. 참으로 어떤 때는 문제를 가지고 오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 해결 될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둘이 다 오는게 아니라 한 사람만 와서 문제 해결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로 중재해서는 안 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명령과 의견을 전하거나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헌법에는 재판을 할 수 있는 여러 치리회가 있는데 당회, 노회, 총회에 재판국을 설치 할 수 있고 그 여러 절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선 화해를 시도한 후에 안될 경우에 하는 것이며 고소장과 죄증설명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통 문제는 재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병에 의하여 교회가 타협 사랑, 양보, 이해의 형제애로 그리고 거룩하신 진리의 원칙아래 분별해주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 사도는 성도들 사이의 사건은 교회 안에서 해결함이 옳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여러분끼리는 해결이 안될 경우에는 교회와 목사님에게 한번 의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싸워서 형제애를 상하고 주님의 영광을 상하는 일이 없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인즉 믿는 형제들끼리 모든 반복과 불화를 그치고 서로 사랑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