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행 23:10
제목 :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라
설교 : 이남웅 목사(95.12.17 주.낮)
사도바울은 공회 앞에서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 사도의 신앙생활의 진실이며 비결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낌 없이 없도록 힘쓰며 깨끗하게 살아온 자기의 생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의 입을 치라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그 말은 역사에 남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날 우리의 설교의 제목이 되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잡기]라는 작업을 인하여 온 나라가 술렁술렁 대고 있습니다. 12.12 사태 때의 승자와 패자가 서로 바뀌어서 그때의 그 승자들은 감옥에 가 있고 그때에 감옥에 있던 이들은 역사의 재조명 앞에 영웅이 되고 있습니다. 역사의 반전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주먹으로 입을 맞을 뻔 했던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받아 사도행전 23:1의 말씀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양심]입니다.
무엇보다 양심은 선악과 하나님의 뜻 여부를 일러주는 영의 한 기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뜻에 이르지 못하거나 혹은 죄를 범할 때에 우리 마음을 질책하고 잘못됨을 순간적으로 지적하고 시정을 명령하거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영의 임무를 ‘양심’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을 어느 정도 대표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거역하거나 하나님을 슬프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경우 그 즉시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자꾸 생각나게 하고 아주 고집스럽게 바른 길을 지시하는 심령의 한 작용이 양심인 것입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에게도 약간의 양심은 있으나 그 양심은 죽은 양심이요, 아담이후 마비된 양심으로서 거의 기능을 상실해서 선악이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죽었던 양심이 예수를 믿을 때 보혈을 의지하여 살아나서 바야흐로 하나님의 뜻과 선을 지향하도록 우리 속에서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도둑놈들이 모여서 남의 돈을 훔쳐가지고 서로 분배를 하는데 하나가 훔친 것 중 일부를 삥땅을 쳤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나 이 속어의 뜻은 ‘몰래 가져갔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도둑들이 하는 말이 [이 양시도 없는 도둑놈아]하고 욕을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이나 구원 못 받은 죄인들의 양심은 그것과 같은 불완전하고 마비된 양심으로서 오늘 우리 성도들이 문제를 삼는 [깨끗하고 거듭난 영의 한 기능인 양심]이 아닌 것입니다. 참된 성도의 양심이 선악을 일러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행할 때는 즉시 지적해서 마음속에 문제를 제기해서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양심의 기능과 권한이 성도의 영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즉 중요 인물 같으니까 “그 양심이 안 된다. 나쁘다.”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영성이 높을수록 그 양심의 권세가 커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한 감독자를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양심을 따라 살면 성령충만과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도 담력을 얻어 기도 응답도 좀 더 쉽게 받을 수 있고 양심을 무시하면 결국 육신 따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양심은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 깨끗한가 아닌가, 하나님의 뜻과 맞는가 안 맞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우리 속에서 잘못되었다 하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양심이 그것은 죄라 하면 틀림없으니 자백하고 회개할 것입니다. 양심은 무서운 집념이 있습니다. 의와 하나님의 뜻과 바른 도리를 지키려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한 번 안 된다, 잘못이다 하면 다시는 양보하는 법이 없습니다. 끝까지 안 되는 것이요, 잘못이고 처음부터 NO하면 끝까지 NO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처럼 뇌물주고 적당히 넘어가려고 해서는 양심을 누그러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은 타협할 줄을 모른다 그 말입니다.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끝까지 NO하고 자기주장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이런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신령한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양심이 정죄하는 것은 즉시 일을 멈추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지적할 때 바로 잡거나 회개하면 크게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이 있을 때 회개보다는
1) 첫째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 시키고 그럴싸한 이유를 대서 양심과 논쟁을 벌리려합니다.
즉 아니라고 핑계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판단과 정죄는 정확하고 후회함이나 타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한 번 지적한 문제는 취소하거나 어떤 이론 때문에 수긍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속에서 번쩍이는 섬광 같은 양심의 판단력과 지적에 즉시 순종하고 이유를 대서 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둘째로 양심을 무마시키려 합니다.
속에서 자꾸만 괴롭히는 양심의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많은 선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양심이 자책한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문득 남의 것을 가져온 죄가 생각나서 회개를 했는데도 마음이 꺼림직 하고 시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빨리 그 주인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빌고 갚으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확실해집니다.
그것은 양심과 성령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럽고 창피해서 도무지 사람 앞에 자백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별 핑계를 다 대며 어떤 이유를 만들거나 다른 선한 일로 그것을 메꾸려 해도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내심의 소리는 점점 강해져갑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성령이 떠나고 은혜가 소멸됩니다. 이런 때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가서 자백하고 갚아야 됩니다. 이런 일은 많이 있습니다.
양심과 성령은 하나가 되어서 오직 진리만을 고집합니다. 한 번 판결이 내리면 뒤집을 수가 없습니다. 선한 일을 천 년을 한다 해도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킬 수 없습니다. 양심이 깨끗하면 하나님과의 사이가 좋아집니다.
3) 셋째로 양심은 영적지식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
양심은 선악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줍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그리스도인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이 비침을 받았기 때문에 더 많은 지식이 있고 어떤 자는 그 지식이 적습니다. 누가 아직 깨닫지 못할 때는 은혜생활에 아무런 문제고 없었는데 그러나 새로운 빛이 오면서 지식이 더해지는 순간부터 그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합니다. 양심의 영적 지식은 너무나도 차이가 있어서 은혜 받은 대로 차이가납니다.
어떤 신자는 다른 사람이 큰 죄로 생각하는 것을 전혀 죄라고 인식 못하므로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숙하기 때문에 오래토록 자라기를 기다리실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바울이가 두 살 때 손을 물으라고 수도를 입에 대주면 이를 악물고 힘껏 물어뜯습니다. 그래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도 없고 오직 악을 쓰고 물고 있습니다. 애기가 그러니까 귀여워해 주지만 지금 중학교 2학년이나 되었는데 아빠를 그렇게 물어뜯으면 큰일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성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이 성장함에 따라 영적 지식이 늘어가고 동시에 양심의 기능도 강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범해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떤 사람은 주일을 범하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일 낮 예배만 지키면 괜찮은데 어떤 사람의 양심은 밤 예배 안 나오면 불안하고 죄의식 때문에 편치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라도 안하면 찜찜하고 괴롭습니다. 어떤 이는 십일조를 안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떤 이는 십일조 안하면 괴롭고 불안하고 편치 않습니다. 누구는 하루라도 성경을 안 읽으면 불안하고, 전도 안하면 이상하고 양심의 예민도가 각각 다릅니다.
그것은 그가 받은 은혜의 양에 따라 받은 빛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성이 높은 자의 양심일수록 성령님과 일치를 보이게 됩니다. 즉 우리의 영이 자라는 것에 따라 양심의 판단력도 자라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면 양심은 침묵하고 성령께서는 은총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런 일 없기를 바랍니다. 아멘.